지금 보면 소름 돋는 과거의 과학
이 글에서는 위험했지만 당시엔 상식이었던 과학 이론들을 소개한다. 과학의 역사는 언제나 진보의 기록으로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지금 기준으로는 섬뜩하게 느껴지는 믿음들도 함께 존재한다. 이 이론들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다. 당시의 지식, 기술, 관찰 수준에서는 충분히 합리적이었고, 오히려 ‘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의심받지 않았다. 문제는 그 상식이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는 점이다.

1. 사혈 요법: 피를 빼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
수천 년 동안 사혈은 가장 보편적인 치료법이었다. 열이 나거나 통증이 있으면 피를 빼는 것이 당연한 처치로 여겨졌다. 이 믿음은 고대 그리스의 체액설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몸은 네 가지 체액의 균형으로 유지되며, 병은 이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과도한 피’를 제거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해결책처럼 보였다. 이 이론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더욱 체계화되었다. 의사들은 증상에 따라 어느 부위에서 얼마만큼의 피를 빼야 하는지 정리했고, 이는 전문 지식의 상징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학 교육을 많이 받은 의사일수록 사혈을 더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문제는 사혈이 환자의 면역력과 체력을 급격히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감염이나 탈수로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그 죽음조차 ‘병이 너무 심했기 때문’으로 해석되었다. 치료가 원인일 수 있다는 생각은 상식 밖의 발상이었다. 사혈 요법이 오래 지속된 이유는 효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효과를 객관적으로 비교할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통계와 실험 설계를 갖추기 전까지, 이 위험한 치료는 합리적인 의학으로 남아 있었다.
2. 손을 씻지 않아도 된다는 의학 상식
19세기까지 병원은 오히려 출산에 위험한 장소였다.
산욕열로 불리는 감염병으로 수많은 산모가 사망했지만, 의사들은 그 원인을 알지 못했다. 당시 의학 상식에 따르면 질병은 공기나 체질 문제에서 비롯되었고, 의사의 손은 위험 요소로 인식되지 않았다. 의사들은 해부 실습을 한 손으로 그대로 분만을 진행했다. 손을 씻지 않는 것은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과학적 훈련을 받은 의사일수록 이 관행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 상식을 처음 의심한 사람이 젬멜바이스였다. 그는 손 씻기만으로 산모 사망률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 즉 세균이라는 개념이 당시 과학의 범위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가 소름 돋는 이유는 명확하다. 수많은 죽음이 무지가 아니라, 확신에 찬 전문성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이다. 상식은 때로 가장 위험한 형태의 신념이 된다.
3. 방사능은 건강에 이롭다는 믿음
방사능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은 경이로운 에너지였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이 현상은 생명력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20세기 초, 방사능은 과학의 최첨단이었고 동시에 건강과 젊음의 비밀로 포장되었다. 방사능이 함유된 음료, 화장품, 치료제가 대중적으로 유통되었고, 일부 의사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소량이니 안전하다는 믿음은 과학적 계산이 아니라 직관에 가까웠다. 방사선의 장기적 영향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식이 위험했던 이유는 방사능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피로 회복이나 통증 완화처럼 보이는 효과도 있었고, 이는 믿음을 더욱 강화했다. 피해가 드러났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방사능이 건강에 좋다는 믿음은 과학이 새로운 현상을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 얼마나 쉽게 낙관으로 기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4. 로보토미: 정신 질환은 뇌를 잘라내면 해결된다는 발상
20세기 중반, 로보토미 수술은 정신의학의 혁신으로 여겨졌다. 우울증, 조현병, 불안 장애는 뇌의 특정 부위가 문제이므로, 그 연결을 끊으면 증상이 완화된다는 논리였다. 당시로서는 약물 치료도, 심리 치료도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 발상은 과학적 돌파구처럼 보였다. 이 수술은 빠르고 간단했으며, 일부 환자에게서는 공격성이 줄어드는 효과도 나타났다. 그러나 그 대가는 인격의 붕괴였다. 감정 표현, 판단력, 자발성이 크게 손상되었지만, 이는 ‘치료의 부작용’으로 정당화되었다. 로보토미가 널리 시행된 이유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의 삶의 질보다는 사회의 관리 편의가 우선시되던 시대적 분위기가 이 상식을 지탱했다. 지금 보면 소름 돋는 이 이론은, 과학이 인간을 이해하기보다 통제의 대상으로 볼 때 얼마나 폭력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5. 우생학: 과학으로 인간을 선별할 수 있다는 믿음
우생학은 한때 가장 ‘과학적인 사회 이론’으로 여겨졌다. 유전학의 초기 발견은 인간의 능력과 성격 역시 유전된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확장되었고, 사회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낳았다. 범죄, 가난, 정신 질환은 열등한 유전자의 결과라는 주장은 통계와 과학 용어로 포장되었다. 이로 인해 강제 불임, 차별 정책, 심지어 대량 학살까지 정당화되었다. 당시에는 이것이 비윤리적이라기보다, 효율적인 사회 개선책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생학이 위험했던 이유는 과학이 틀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불완전한 과학이 사회적 편견과 결합했을 때, 그 파괴력이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은 중립적이라는 믿음이 오히려 비판을 막았다. 이 사례는 과학이 상식이 되는 순간, 반드시 윤리적 질문이 동반되어야 함을 강하게 경고한다.
과학은 언제 위험해지는가
지금 우리가 소름 돋는다고 느끼는 과거의 과학 이론들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도 분명 ‘과학’이었다.
그것들은 무지의 산물이 아니었고, 비이성적인 믿음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의 지식 수준과 기술, 경험을 바탕으로 매우 합리적으로 구성된 설명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얻는 순간, 그 이론은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가장 위험해지는 지점은 틀릴 때가 아니라, 의심받지 않을 때다. 사혈 요법은 오랜 세월 동안 의학의 정석이었고, 로보토미는 인도적인 치료로 칭송받았다. 방사능은 미래의 에너지였고, 우생학은 사회를 개선할 수 있는 합리적 설계도처럼 보였다. 이 이론들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결과가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이 너무나 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믿음들을 지탱한 힘은 ‘상식’이었다. 상식은 경험의 축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질문이 멈춘 지점에서 굳어진 생각일 때가 많다. 모두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 누구도 다시 묻지 않는다. 그리고 과학은 질문을 멈추는 순간, 가장 비과학적인 형태로 변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과학자들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다. 그들 역시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문제는 과학이 인간을 설명하는 도구에서, 인간을 다루는 기술로 바뀌는 순간 발생한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정교한 과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과거 사람들이 가졌던 것과 매우 비슷한 확신도 함께 지니고 있다. 데이터가 말해주고, 알고리즘이 증명하며, 모델이 예측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과학은 완벽해질수록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강력해질수록, 더 많은 겸손을 요구한다. 과학의 진보는 새로운 답을 얻는 속도가 아니라, 스스로의 전제를 얼마나 자주 의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의 상식 역시 언젠가는 다음 세대에게 소름 돋는 사례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틀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틀릴 수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다.
과학이 인간에게 이로운 힘으로 남기 위해 필요한 태도는, 언제나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이 생각은 너무 당연해 보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