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함이 만든 과학 혁명 이야기
과학의 결정적 순간들은 흔히 천재의 번뜩임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따라가 보면, 세상을 바꾼 힘은 영감보다도 훨씬 집요한 성질을 띠고 있다. 남들이 이미 답이 나왔다고 여긴 문제를 다시 붙잡고, 실패해도 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이해받지 못해도 멈추지 않는 태도. 이 글은 바로 그런 집착의 힘이 과학을 어떻게 전진시켜 왔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1. 갈릴레오 갈릴레이: 관측을 포기하지 않은 집착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집착은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이미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제시된 상태였고, 수학적으로도 정리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이론이 현실 세계와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갈릴레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추지 못했다. 그는 “정말로 하늘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관측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망원경을 개량해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시도는 단순한 기술적 도전이 아니었다. 그는 달의 표면이 매끈하지 않다는 사실, 목성의 위성이 움직인다는 사실, 금성의 위상이 변한다는 사실을 하나씩 기록했다. 이 관측들은 모두 하나의 결론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결론은 당시 사회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갈릴레오는 비판을 알면서도 관측을 반복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보다 관측 결과를 더 중요하게 여겼고, 반박이 나올 때마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집착은 결국 종교 재판과 침묵이라는 대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은 ‘지동설’이라는 주장보다, 자연은 관측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는 태도였다.
갈릴레오의 집착은 우주의 구조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바꾸었다. 과학이 권위의 해석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관측 위에 서야 한다는 원칙을 남긴 것이다.
2. 마이클 패러데이: 이해될 때까지 실험을 멈추지 않은 집착
마이클 패러데이의 집착은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더욱 강해졌다.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수학적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과학계는 수식과 이론을 중시했기 때문에, 패러데이의 실험 중심 접근은 체계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 쉬웠다.
그러나 패러데이는 전기와 자기가 연결되어 있다는 직감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석과 코일, 전류의 방향과 세기를 바꾸며 수없이 많은 실험을 반복했다. 이 실험들은 즉각적인 성과를 내지 못했고, 실용성도 불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관찰 기록을 쌓아갔다.
패러데이의 집착은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에 있었다. 그는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 집요함은 결국 전자기 유도라는 개념으로 이어졌고, 이후 맥스웰 방정식을 통해 이론적으로 완성된다.
패러데이는 과학 혁명이 반드시 이론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끝까지 실험을 반복하는 집착이 이론보다 먼저 길을 열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다.
3. 그레고어 멘델: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계속된 집착
멘델의 집착은 조용했고,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수도원에서 완두콩을 교배하며 수년간 실험을 반복했다. 꽃의 색, 씨앗의 모양, 세대를 거듭한 비율을 꼼꼼히 기록했지만, 그 연구는 당대 생물학의 관심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생물학자들은 유전을 연속적인 혼합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멘델의 ‘불연속적인 유전 단위’ 개념은 너무 단순해 보였고, 그래서 더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의 논문은 발표되었지만 거의 읽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멘델은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수치 속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했고, 그 패턴이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이 집착은 즉각적인 명성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기록은 사라지지 않았다.
멘델의 혁명은 생전이 아니라 사후에 완성되었다. 그의 집요함은 과학이 즉각적인 인정이 없어도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4. 마리 퀴리: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멈추지 않은 집착
마리 퀴리의 집착은 과학적 호기심과 개인적 희생이 맞닿아 있는 지점에 있었다.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현상은 누구에게나 위험했지만, 그녀는 그 위험을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 연구를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수많은 실험을 통해 방사성 원소를 분리했고, 이 과정은 극도의 노동과 반복을 요구했다. 당시에는 방사능의 장기적 영향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고, 퀴리는 직접 시료를 다루며 연구를 이어갔다.
그녀의 집착은 두 개의 노벨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동시에 건강을 앗아갔다. 그럼에도 퀴리는 연구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집착은 명예가 아니라, 알아야만 했던 질문에 대한 책임이었다.
마리 퀴리는 과학적 집착이 얼마나 위대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집착은 과학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재능이 아니라 태도였다. 모두가 멈추는 지점에서 멈추지 않았고, 충분히 설명되었다는 말 앞에서 다시 질문했다. 집착은 종종 비효율적이고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과학에서는 그 집착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다.
과학 혁명은 한순간의 깨달음이 아니라, 같은 질문을 끝까지 붙잡는 시간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집요함은 언제나 한 사람의 고독한 선택에서 시작된다.
집착과 광기의 경계에서 과학은 전진했다
한 사람의 집착은 종종 위험해 보인다. 그것은 주변의 조언을 무시하고, 상식과 타협하지 않으며, 때로는 사회적 관계나 개인의 안정을 희생시키는 태도로 나타난다. 그래서 집착은 오랫동안 ‘과학적 미덕’이라기보다 경계해야 할 성향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를 찬찬히 되짚어보면,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사용하는 수많은 지식과 기술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한 사람의 비정상적으로 끈질긴 집요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이 집착이 단순한 고집이나 독선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과학자를 움직인 집착은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견디면서도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였다. 수백 번의 실패 속에서도 실험 노트를 덮지 않았고, 조롱과 무시 속에서도 같은 문제를 다시 붙잡았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한 지점을 그냥 넘기지 못했을 뿐이었다.
당대의 기준에서 보면 이 집착은 종종 위험했다. 기존 질서를 흔들었고, 때로는 윤리적 논쟁을 불러왔으며, 사회적 불안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은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했고, 어떤 이는 미치광이로 불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남은 것은 그들의 평판이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질문의 흔적이었다.
과학은 언제나 안전한 길 위에서 발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불안정하고, 가장 의심받던 순간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집착은 그 불안정한 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었다. 모두가 멈추라고 말할 때 멈추지 않는 것, 충분히 설명되었다는 말 앞에서 다시 묻는 것, 이미 실패했다고 결론 내려진 실험을 다시 반복하는 것. 이 반복과 집요함이 없었다면 과학은 지금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였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합리성과 객관성을 과학의 핵심 가치로 말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현상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적인 성향, 즉 집착이 자리한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보다, 그 질문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시간이 과학을 전진시킨다. 그리고 그 시간은 대개 외롭고, 비효율적이며, 주변에서 이해받지 못한다.
이 글에서 살펴본 순간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불편한 사실을 남긴다. 과학을 바꾸는 힘은 언제나 균형 잡힌 태도에서만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로는 과도해 보이는 집중, 위험해 보이는 고집, 집요함에 가까운 끈기가 세상을 바꾼다. 물론 모든 집착이 옳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소수의 사람이 없다면, 과학은 안전한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만 맴돌게 될 것이다.
어쩌면 과학 혁명은 위대한 발견의 순간보다, 포기하지 않는 하루하루의 반복에서 만들어진다. 남들이 이미 답을 내렸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다시 한번 실험을 준비하고, 다시 한번 데이터를 확인하는 그 집요한 태도 말이다. 한 사람의 집착은 때로 위험해 보이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