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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들 : 과학과 음모론이 벌이는 2,500년의 사투

by 하로하로하 2025. 12. 28.

인류는 이미 1960년대에 달에 발을 딛고, 현재는 민간 우주선이 지구 궤도를 오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는 "지구는 사실 평평하며, 우리는 거대한 음모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가십거리로 치부하기엔 그 세력이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이들은 자체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나름의 '실험'을 통해 과학계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왜 인간은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눈을 감는 것일까요? 오늘은 고대인들의 소박한 믿음에서 시작해, 현대 음모론으로 변질된 지구 평면설의 역사, 그리고 이를 무너뜨리는 과학적 반박과 그 이면의 심리학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들 : 과학과 음모론이 벌이는 2,500년의 사투
지구 평면설을 믿는 사람들 : 과학과 음모론이 벌이는 2,500년의 사투

1. 인류 지성사의 출발: 지구 구형설의 탄생과 확립

1-1. 직관의 시대와 고대 문명의 우주관

인류 문명의 초기,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평평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지구가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원반이라고 믿었고, 하늘은 그 위를 덮고 있는 돔(Dome) 형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이집트와 초기 인도 문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직관적 우주관'이었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은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구(Sphere)'가 가장 완벽한 기하학적 형태라고 믿었기에 지구가 구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에우독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과학적 관찰의 영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 때 달에 비치는 지구의 그림자가 항상 '둥근 곡선'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만약 지구가 원반이라면, 달이 뜨는 각도에 따라 그림자가 타원이나 직선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북쪽으로 여행할 때와 남쪽으로 여행할 때 보이는 별자리가 다르다는 점은 지표면이 곡면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1-2. 에라토스테네스의 기적적인 측정

기원전 3세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었던 에라토스테네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험 중 하나를 수행합니다. 그는 하굿날 정오에 시에네(현재의 아스완)에서는 우물 끝까지 햇빛이 비치지만(태양이 머리 위에 있음),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두 도시 사이의 거리와 그림자의 각도를 이용해 지구의 둘레를 계산했습니다. 그 결과값은 현대의 측정치와 단 1~2% 내외의 오차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인류가 이미 2,200년 전에 지구의 모양뿐만 아니라 크기까지 알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2. 현대 지구 평면설의 뿌리: 새뮤얼 로보텀과 '제테틱' 철학

지구 평면설이 현대적인 음모론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영국에서였습니다. 새뮤얼 로보텀(Samuel Rowbotham)은 '제테틱(Zetetic, 탐구하는)'이라는 이름의 철학을 내세우며,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개인의 감각적 경험을 결합한 《천문학은 가짜다(Zetetic Astronomy)》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그는 지구가 북극을 중심으로 한 원반이며, 가장자리는 45미터 높이의 거대한 얼음벽인 남극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현대 '국제 지구 평면 학회(TFES)'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과학적 데이터는 '조작된 권위'일 뿐이며,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만이 진실이라는 극단적 경험주의를 내세웁니다.

3. 그들이 주장하는 '평평한 지구'의 논리와 과학적 허점

현대 지구 평면론자들은 유튜브와 SNS를 통해 자신들의 논리를 전파합니다. 그들의 대표적인 주장과 이에 대한 과학적 반박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3-1. 지평선은 왜 항상 평평해 보이는가?

  • 주장: 비행기를 타고 고도 10km까지 올라가도 지평선은 여전히 일직선이며 눈높이에 위치한다. 지구가 둥글다면 아래로 굽어 보여야 한다.
  • 반박: 지구의 반지름은 약 6,371km입니다. 인간이 비행기로 올라가는 높이는 지구 크기에 비하면 사과 껍질의 두께보다 얇습니다. 이 정도 높이에서는 지평선의 곡률을 육안으로 감지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고성능 기상 관측 풍선을 30km 이상 띄우면 지표면의 곡선이 명확히 드러납니다.

3-2. 남극 얼음벽과 비행 금지 구역

  • 주장: 남극은 대륙이 아니라 지구 전체를 감싸는 얼음벽이다. UN과 NASA가 군대를 동원해 일반인의 남극 접근을 막고 있다.
  • 반박: 남극은 수많은 국가의 과학 기지가 상주하며 연구가 진행되는 열린 공간입니다. 매년 수만 명의 관광객이 남극을 방문하고 크루즈가 남극 해안을 항해합니다. 만약 남극이 거대한 벽이라면 남반구 도시들(예: 시드니에서 산티아고) 사이의 비행시간은 평평한 지도상에서 엄청나게 길어져야 하지만, 실제 비행시간은 지구가 구형일 때의 경로(대권 항로)와 완벽히 일치합니다.

3-3. 중력은 환상이며 밀도와 부력일 뿐이다

  • 주장: 중력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단순히 공기보다 무겁기(밀도) 때문이다.
  • 반박: 밀도와 부력은 방향성이 없습니다. 중력이 없다면 밀도가 높은 물체가 왜 '아래'로 가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공 상태(공기 밀도가 0인 곳)에서 볼링공과 깃털을 떨어뜨리면 똑같이 자유 낙하하는 실험은 중력이 질량에 작용하는 독립적인 힘임을 보여줍니다.

4. 왜 멈추지 않는가? 음모론의 심리학

지구 평면설이 지속되는 이유는 과학적 지식의 부족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심리적 기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4-1. 전문가 집단에 대한 불신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대중은 전문가 시스템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정부와 권위자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불신이 팽배해졌습니다. 지구 평면설은 이러한 반권위주의적 정서가 과학의 영역으로 표출된 사례입니다.

4-2. 선민의식과 커뮤니티의 소속감

"세상 모든 사람이 속고 있을 때, 나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생각은 강력한 자존감 회복 수단이 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결속된 이들은 외부의 비판을 '무지한 자들의 공격'으로 규정하며 내부 결속력을 다집니다.

4-3. 확증 편향과 알고리즘의 늪

유튜브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한 번 음모론 영상을 시청하면 유사한 콘텐츠를 끊임없이 추천합니다. 이는 '에코 체임버(Echo Chamber)' 현상을 만들어, 사용자가 보고 싶은 정보만을 보게 하고 반대 증거는 철저히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5. 우리가 지구 평면설을 진지하게 대면해야 하는 이유

어떤 이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이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지구 평면설을 받아들이는 논리 구조는 백신 거부, 기후 위기 부정 등 공중보건과 인류의 생존이 직결된 다른 음모론으로 쉽게 전이됩니다.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고 주관적 신념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확산될 때, 합리적 토론은 불가능해지며 사회적 비용은 증가합니다. 결국 지구 평면설과의 싸움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무엇이 진실인가'를 판단하는 합리적 사고방식을 지켜내는 싸움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시속 약 1,600km의 속도로 자전하는 거대한 구체 위에 올라타 우주를 유영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중력이 우리를 붙들어주고 있으며, 둥근 지표면 덕분에 우리는 계절의 변화와 밤낮의 신비를 경험합니다.

지구 평면설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과학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단순히 교과서에 적힌 내용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왜 지구가 둥근지 스스로 질문하고 증명할 수 있는 '과학적 문해력'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우리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우리가 무한한 우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출발점입니다.